세종의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복귀
2025-11-22, G30DR
1. 서론: 성군(聖君)의 치세와 신분제의 역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재위 기간(1418~1450)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방면에서 민족 문화가 만개한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훈민정음의 창제, 집현전을 통한 학문 연구의 심화, 측우기와 자격루로 대표되는 과학 기술의 발달, 그리고 4군 6진 개척을 통한 영토의 확장은 세종을 단순한 통치자를 넘어 민족의 스승인 ’성군’의 반열에 올렸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이러한 찬란한 업적의 이면에는 조선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중대한 제도적 전환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바로 세종 14년(1432년)에 단행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으로의 회귀가 그것이다. 이는 부왕인 태종(太宗)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정면으로 뒤집는 조치였으며, 결과적으로 조선 전기 신분 구조를 고착화하고 노비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본 보고서는 세종이 왜 선왕의 유지를 깨고 종모법으로의 회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왕실의 법령 개정 차원을 넘어, 15세기 조선의 지배 엘리트인 사대부(士大夫) 계층의 경제적 이해관계, 성리학적 이념과 현실의 괴리, 국가 재정 및 국방력 확보라는 거시적 통치 전략의 충돌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연구 성과들은 세종의 결정이 단순한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기득권 세력과의 고도의 정치적 타협이자 통치 효율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본 연구는 태종과 세종의 통치 철학 비교,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 그리고 법령 변화가 가져온 장기적인 파장을 정밀하게 추적하여, ’애민(愛民)’을 기치로 내건 세종의 시대가 역설적으로 ’노비제 사회(Slave Society)’로 진입하게 된 역사적 메커니즘을 규명하고자 한다.
2.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사회 변동과 신분제의 혼란
2.1 고려 말의 신분제 붕괴와 원(元) 간섭기의 유산
조선 건국 이전, 고려 말기의 사회는 극심한 혼란 속에 있었다.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은 토지와 노비를 불법적으로 겸병하며 거대한 농장을 형성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신진사대부들은 토지 제도 개혁과 신분 질서의 재확립을 주장했다. 특히 원 간섭기를 거치며 유입된 몽골풍의 관습과 잦은 전란은 기존의 엄격했던 양천(良賤) 구분을 흐트러뜨렸다. 1에 따르면,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노비 제도는 존재했으나, 고려 말기에는 양인과 노비가 결합하여 낳은 자식에 대한 신분 규정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시에는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무조건 천민이 되는 관습법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나, 이는 국가의 공민(公民)을 확보해야 하는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양인의 감소를 의미하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2.2 조선 건국과 양천제(良賤制)의 확립 시도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을 위시한 개국 공신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를 지향했다. 이들이 구상한 이상적인 국가는 모든 백성이 국가에 직접 세금을 내고 군역을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의 사회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개국 공신들조차 막대한 수의 사노비(私奴婢)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노비는 토지와 함께 사대부 경제 기반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건국 초기에는 노비 제도를 혁파하기보다는, 노비의 신분 세습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더 시급한 과제였다. 양인과 천민의 혼인, 즉 양천교혼(良賤交婚)이 빈번해지면서 태어나는 자식들의 신분 귀속 문제는 국가(공적 영역)와 양반(사적 영역) 간의 ‘인구 쟁탈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3. 태종의 승부수: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과 국가 권력의 강화
3.1 태종 이방원의 통치 철학: 공적 영역의 확대
태종은 조선의 기틀을 다진 군주로서, 그의 통치 제1원칙은 왕권 강화와 국가 재정의 확충이었다. 그는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군사권을 국왕에게 귀속시켰고, 억불숭유 정책을 통해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태종 14년(1414년)에 단행된 ’노비종부법’의 시행은 사대부의 사적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공적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2의 분석과 같이, 태종은 유학자적 소양과 냉철한 정치가의 면모를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백성을 위한 선택을 감행했는데, 종부법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종부법은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도 양인이 된다“는 파격적인 원칙이었다. 당시 사회적 관행상 양반 남성(양인)이 자신의 여종(천인)이나 타인의 여종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기존의 관습대로라면 이 아이들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어야 했지만, 태종은 이들을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3.2 군역 자원 확보와 사대부 경제의 견제
태종이 종부법을 밀어붙인 핵심 이유는 명확했다.
- 양인 인구의 증대: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고 군대에도 가지 않는 ’비국민’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양인은 조세와 국방의 의무를 지는 국가의 토대였다. 태종은 노비가 재생산되는 고리를 끊고, 이들을 양인으로 편입시켜 국가의 세원과 병력을 늘리고자 했다.
- 양반의 재산 증식 억제: 노비는 양반의 핵심 재산이었다. 종부법은 양반들이 첩을 통해 낳은 자식들을 자신의 노비로 부릴 수 없게 만들었다. 내 핏줄이 섞인 자식이 나의 노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양인으로서 내 집을 나가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양반 가문의 재산 축적을 구조적으로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2에서 태종이 측근들의 반대를 무릅썼다는 기록은, 이 정책이 지배층의 경제적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했음을 방증한다.
3.3 종부법의 한계와 사회적 저항
그러나 태종의 종부법은 시행 과정에서 끊임없는 잡음과 저항에 시달렸다.
- 친자 확인의 어려움: 당시의 과학 기술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명확히 입증하기 어려웠다. 노비들이 서로 짜고 아버지가 양인이라고 거짓 주장하거나, 반대로 주인이 친자임을 부인하는 등 소송이 남발되었다.
- 윤리적 혼란: 유교적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적 사대부들은 종부법이 첩을 두거나 노비와 간통하는 행위를 조장하고, 적서(嫡庶)의 구분을 어지럽힌다고 비판했다.
- 기득권의 조직적 반발: 무엇보다 양반 관료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노비가 줄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태종 앞에서는 숨을 죽였으나,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억눌러왔던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4. 세종의 결단: 노비종모법으로의 회귀와 그 논리
세종 14년(1432년), 조정은 격렬한 논쟁 끝에 노비종부법을 폐지하고 노비종모법으로의 환원을 결정한다. 이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윤리’와 ’순리’를 내세웠으나, 그 이면에는 사대부의 경제적 욕구 수용, 통치의 효율성 제고, 그리고 세종 특유의 현실 정치 감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4.1 성리학적 명분론: “종류가 다르면 짝이 될 수 없다”
세종이 종모법 회귀를 정당화하며 내세운 논리는 철저히 유교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었다. 3과 3에 소개된 세종과 상정소(詳定所)의 고증 내용은 당시의 지배적 이념을 잘 보여준다.
“삼가 고증하여 보니 사람은 각각 짝이 있으니 종류가 모름지기 서로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양민과 천민은 이미 유(類)가 서로 다른 것인데 어째 배필로 결합하기에 마땅하겠습니까.” 3
이러한 ’이류불혼(異類不婚)’의 논리는 양반과 노비의 결합 자체를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했다. 태종의 종부법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비정상적 결합(양천교혼)을 통해 태어난 자식을 양인으로 인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양천 간의 결합을 묵인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었다. 따라서 “낳은 자녀는 아비를 따라 양민이 되게 할 수 없으니, 각기 본관 또는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소서“라는 결론은,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태어난 결과물을 다시 원점(어머니의 신분인 천민)으로 돌려놓는 것이 ’천리(天理)’에 부합한다는 주장이었다.
4.2 양천교혼 금지와 사대부의 특권적 예외 조항
세종의 종모법은 ’양천교혼 금지’라는 강력한 원칙과 함께 도입되었다. 법적으로는 양반 남성이 노비 여성과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고 처벌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3의 분석에서 드러나듯, 이 법에는 치명적인 맹점이자 의도된 ’구멍’이 존재했다.
“1품관 이하 동서반의 품관, 문과 무가의 출신자와 생원, 성중 유음 자손인 자가 공사 비녀(여종)에게 장가든 자는 이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3
이는 실질적으로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무제한의 면죄부를 주는 조항이었다. 일반 평민(양인) 남성이 노비와 결혼하는 것은 엄격히 막아 양인 인구의 유출을 방지하려 했으나, 권력을 쥔 관료와 예비 관료(생원 등)들이 첩을 들이거나 여종을 건드리는 행위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즉, 사대부들은 ’윤리’를 내세워 법을 개정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성적 방종과 재산 증식 수단(노비 생산)을 합법적으로 보장받는 특권을 확보한 것이다.
4.3 행정적 효율성과 소송 비용의 절감
세종이 종모법을 선택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행정적 현실론이었다. 태종 시대에는 아버지를 증명하기 위한 소송(친자 확인 소송)이 끊이지 않아 행정력이 낭비되었다. 아버지는 거짓으로 꾸며낼 수 있지만, 어머니는 출산의 사실이 명확하므로 속일 수 없다.
4와 5은 당시 신분을 변경할 수 있는 소송 제도가 존재했음을 지적하며, 노비종모법이 이러한 소송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를 예방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복잡한 절차를 생략하고,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라는 단순 명쾌한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행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사회적 분쟁을 줄이고자 했던 통치자의 고뇌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5. 노비종모법과 일천즉천(一賤卽賤)의 법적·실질적 차이
세종의 종모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 혼동되는 ’일천즉천’과의 개념적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대중적으로는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법리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체계이다.
5.1 법리적 구분: 모계 우선주의 vs 최하위 신분 우선주의
6와 6은 이 두 가지 법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한다.
| 구분 | 노비종모법 (奴婢從母法) | 일천즉천 (一賤卽賤) |
|---|---|---|
| 기본 원칙 | 자녀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른다. |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민이면 자녀는 천민이다. |
| 부:노비 + 모:양인 | 자녀는 양인 (어머니가 양인이므로) | 자녀는 천민 (아버지가 천민이므로) |
| 부:양인 + 모:노비 | 자녀는 천민 (어머니가 천민이므로) | 자녀는 천민 (어머니가 천민이므로) |
| 지향점 | 혈통의 명확성 (모계) 중심 | 신분 하락의 극대화 |
표에서 보듯, 종모법 하에서는 아버지가 노비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일천즉천보다 논리적으로는 완화된 조치처럼 보인다. 실제로 세종은 6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어머니가 양인이라면 아버지가 노비여도 자식이 노비가 되지는 않는 법“을 통해 일말의 신분 상승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5.2 사회적 현실과 ’일천즉천’화 된 결과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Context)이었다. 조선 전기 사회에서 양인 여성이 남자 노비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반면, 양반 남성이 자신의 여종이나 타인의 여종을 첩으로 삼거나 성적으로 관계를 맺는 경우는 매우 빈번하고 구조화된 현상이었다.
따라서 통계적으로 압도적 다수의 혼혈 자녀는 ’부:양인(양반) + 모:노비’의 조합에서 태어났다. 이 경우 종모법을 적용하면 자녀는 어머니를 따라 노비가 된다. 결과적으로 종모법은 법리적으로는 일천즉천과 달랐으나, 현실적인 적용 결과에 있어서는 양반 남성들의 성적 특권과 결합하여 노비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사실상의 일천즉천’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는 세종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대부들의 자산 증식 욕망에 가장 부합하는 결과였다.
6. 종모법 시행의 경제학: 노비는 번식하는 자산이다
세종의 결정 이면에 깔린 가장 강력한 동인은 경제적 요인, 즉 사대부들의 재산 증식 욕구였다. 15세기 조선에서 노비는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토지와 더불어 부(富)의 척도이자 자본 그 자체였다.
6.1 사대부의 자산 포트폴리오와 노비
7과 7은 노비가 갖는 경제적 가치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노비는 조선 시대 양반들에게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재산 증식의 주요 수단이자 사회적 신분과 권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새끼를 낳아 번식을 한다고 본 것이다.” 7
양반들에게 여종(婢)은 자산을 증식시키는 ’자본재’였다. 태종의 종부법 하에서는 내 여종이 낳은 자식이 아버지가 양인이라는 이유로 양인이 되어 내 집을 나가버리므로, 이는 명백한 자본 유출이자 손해였다. 반면 세종의 종모법 하에서는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없이 내 여종이 낳은 자식은 내 소유의 노비가 된다. 이는 자가 증식하는 자산과 같았다. 양반들은 이를 위해 여종의 출산을 장려했고, 심지어 양인 남성을 유인하여 자신의 여종과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합법적으로 노비를 생산하기도 했다.
6.2 부의 축적 사례: 16세기 권벌의 경우
이러한 법적 보호 아래 양반들의 노비 소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7에서 예시로 든 16세기 도승지 권벌(權橃)의 경우, 사망 당시 무려 317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중소기업 규모의 인력을 사적으로 거느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노비들은 농경 노동뿐만 아니라 수공업, 상업 활동, 가사 노동 등 전방위적인 경제 활동에 투입되어 주인의 부를 창출했다. 세종의 종모법은 이러한 대토지 소유자들과 관료 귀족층의 경제적 기반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로 작용했다.
7. 사회적 파장과 세종의 보완책
종모법의 시행은 조선 사회의 인구 구조와 신분 질서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세종 역시 이러한 부작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며, 나름의 보완책을 강구했다.
7.1 노비 인구의 급증과 양인의 감소
8에 따르면, 종모법 시행 이후 노비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노비 여성이 출산한 자녀가 계속 노비로 귀속되면서 노비 계층이 확대되고 고착화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국가가 세금을 걷고 군역을 부과할 수 있는 양인 인구의 감소로 이어졌다. 양반의 창고는 풍족해졌으나, 국가의 국고와 병적(兵籍)은 잠재적인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세종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의 전체 인구 중 노비 비율이 30~40% 이상으로 치솟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7.2 세종의 견제 장치와 예외 규정
세종은 노비의 무제한적인 증가를 막기 위해 몇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4의 내용에 따르면, 세종은 종친과 관료, 40세 이상인 백성의 자손에게는 예외 규정을 적용하여 노비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거나, 보충대(補充隊) 입속 등을 통해 신분을 변경할 수 있는 소송의 길을 열어두었다. 또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하여 제도의 악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거대한 시대적 흐름, 즉 사대부들의 탐욕과 노비 증가라는 대세(Trend)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인 미봉책에 불과했다.
7.3 국방력 강화를 통한 인력 손실 보완
흥미로운 점은 세종이 노비 증가로 인한 병력 자원의 질적 저하를 기술력으로 보완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4와 5은 세종이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등용하여 화포와 화약 무기를 대대적으로 개발했음을 강조한다.
“화포를 설비하였다가 적이 침입하거든 시기에 응하여 쏘면 열 사람이 적 1백 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5
세종은 줄어드는 양인 병력(Manpower)의 공백을 화포와 같은 첨단 병기(Firepower)의 도입으로 메우고자 했다.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화포의 수를 조사하게 하고, 병기 공학에 아낌없이 투자한 것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신분제 변동에 따른 국방력 약화를 상쇄하기 위한 군주의 고육지책이자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
8. 인물로 보는 종모법의 명암
8.1 장영실(蔣英實): 능력과 신분의 유리천장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자 장영실은 종모법의 모순과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7에 따르면 실록에는 그의 아버지가 원나라 사람이고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관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법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면천(免賤)시켜 관직을 제수했다. 이는 세종이 종모법이라는 거대한 굴레를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인재에 대해서는 왕의 특권으로 그 굴레를 벗겨주는 유연성을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장영실조차 말년에는 간의대 파손 사건으로 삭탈관직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더라도, 신분의 벽을 완전히 넘어서기 힘들었던 조선 사회의 경직성을 시사한다.
9. 장기적 관점: 17~18세기의 변화와 비교
8은 시야를 확장하여 세종 이후 조선 후기의 변화를 조망한다. 세종 시대에 고착화된 노비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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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필요: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 나고 군역 자원이 부족해지자, 국가는 납속책(納粟策)이나 공명첩 등을 통해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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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세습제의 붕괴: 17~18세기에 이르면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상업의 성장으로 노비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하고, 노비들이 도망치거나 돈을 모아 신분을 사는 일이 빈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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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 해방: 이러한 흐름은 1801년 공노비 해방,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며 법적인 신분제 철폐로 귀결된다.
세종의 종모법이 노비제를 강화하는 시발점이었다면, 17세기 이후의 흐름은 그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해체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10. 결론: 현실과 타협한 성군의 고뇌
세종이 노비종모법으로 되돌린 것은 단순한 실책이나 사대부에 대한 굴복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는 **1) 성리학적 명분론(인륜의 조화와 이류불혼), 2) 지배층의 핵심 이익 수용(사대부와의 정치적 연합), 3) 통치의 효율성(소송 감소와 신분 명확화)**이라는 세 가지 축이 정교하게 맞물린 결과였다.
태종이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기득권과 피를 흘리며 싸웠다면, 세종은 ’안정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기득권과 타협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나 영토 개척과 같은 국가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사대부 계층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인 노비 문제를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화포 개발과 같은 기술적 해법과 부분적인 예외 조항을 통해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결국 세종의 선택은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꿈꾸면서도 현실적인 지배 연합(Sadaebu)의 기반 위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했던 성군(聖君)의 불가피한 현실 타협의 산물이었다. 종모법은 조선 전기 문물 제도의 발달을 가능케 한 물적 토대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조선을 경직된 신분제 사회로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이는 위대한 지도자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시대적 한계와 기득권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엄정한 교훈이다.
10.1 요약표: 태종과 세종의 노비 정책 비교
| 비교 항목 | 태종 (노비종부법) | 세종 (노비종모법) |
|---|---|---|
| 시행 연도 | 1414년 (태종 14년) | 1432년 (세종 14년) |
| 신분 결정 기준 | 부계 중심 (아버지가 양인이면 양인) | 모계 중심 (어머니가 노비면 노비) |
| 정치적 목적 | 왕권 강화, 신권 견제, 공민 확보 | 왕권과 신권의 조화, 사회 안정 |
| 경제적 효과 | 양반 재산 증식 억제, 국가 세원 확대 | 양반 재산 증식 보장, 국가 세원 잠재적 감소 |
| 지배층 반응 | 강력한 반발 및 저항 | 환영 및 적극적 지지 |
| 보완책 | 강력한 법 집행 및 처벌 | 화포 개발(국방), 면천 소송 제도, 예외 조항 |
| 역사적 의의 | 공적 국가 시스템 강화 시도 | 사대부 중심의 신분제 사회 고착화 |
11. 참고 자료
- 조선은 노예제 사회인가? - 서양의 노예와 조선의 노비! - 통합 게시판 - Daum 카페, https://m.cafe.daum.net/baikall/Bcpo/219?listURI=%2Fbaikall%2FBcpo
- [#조선왕조실록] 노비종부법- 태종이방원, 공신보다 나라가 먼저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EDO7FYgZZm0
- 조선왕조실록 - 세종은 왜 노비종모법으로 돌아갔을까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Y1Y3BU8n1vQ
- 세종(조선)/업적 (r358 판)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4%B8%EC%A2%85(%EC%A1%B0%EC%84%A0)/%EC%97%85%EC%A0%81?uuid=130d34af-c838-477d-a5c8-a14b8815b945
- 세종(조선)/업적 (r376 판)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4%B8%EC%A2%85(%EC%A1%B0%EC%84%A0)/%EC%97%85%EC%A0%81?uuid=c56389ea-6c67-4ed6-beea-9281e4c9d207
- 11월 22, 2025에 액세스, [https://namu.wiki/w/%EB%85%B8%EB%B9%84%EC%A2%85%EB%AA%A8%EB%B2%95#::text=%ED%9D%94%ED%9E%88%20%EC%9D%BC%EC%B2%9C%EC%A6%89%EC%B2%9C%EA%B3%BC%20%EB%85%B8%EB%B9%84,%EB%90%98%EC%A7%80%EB%8A%94%20%EC%95%8A%EB%8A%94%20%EB%B2%95%EC%9D%B4%EC%97%88%EB%8B%A4.](https://namu.wiki/w/노비종모법#::text=흔히 일천즉천과 노비, https://namu.wiki/w/%EB%85%B8%EB%B9%84%EC%A2%85%EB%AA%A8%EB%B2%95#:~:text=%ED%9D%94%ED%9E%88%20%EC%9D%BC%EC%B2%9C%EC%A6%89%EC%B2%9C%EA%B3%BC%20%EB%85%B8%EB%B9%84,%EB%90%98%EC%A7%80%EB%8A%94%20%EC%95%8A%EB%8A%94%20%EB%B2%95%EC%9D%B4%EC%97%88%EB%8B%A4.
- 인간을 재산으로 본 조선 시대가 노비의 나라가 된 이유, https://teamjake.tistory.com/106
- (챗지피티) 노비종모법으로 노비의 숫자가 줄어들었나요? - Daum 카페, https://table-m.cafe.daum.net/p/2945409216/433137270499049728